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두정의 내전 (문단 편집) ===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의 전쟁 === [[파일:311년의 로마 제국 정세.png]]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에 전력을 쏟기 전에 서방 정제 리키니우스와 손을 잡기로 하고, 311/312년 겨울 자신의 누이였던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를 리키니우스와 결혼시켰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이에 대응하여 로마에 사절을 파견해 막센티우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그를 황제로 공인하겠다고 제안했고, 막센티우스는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리키니우스 연합과 막센티우스-막시미누스 다이아 동맹이 결성되었다. 312년 봄, 콘스탄티누스 1세는 4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처음 마주친 요새화된 마을 세구시움을 재빨리 함락시켰지만('''세구시움 전투'''), 지난날 갈레리우스가 약탈을 자행해 주민들의 원한을 샀던 걸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병사들에게 마을을 절대로 약탈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그들을 친근하게 대해 민심을 얻었다. 이후 진군을 이어간 그는 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오늘날 이탈리아 투린) 서쪽에서 막센티우스의 중무장한 기병대와 맞붙어 크게 이겼다('''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 전투'''). 토리노는 자신들에게 도주해온 막센티우스의 병사들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고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성문을 열었으며, 북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2년 여름 중반까지 메디올라눔에서 군대를 쉬게 한 뒤 브리샤(오늘날 이탈리아 브레시아)로 이동해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적군을 가볍게 격파한 뒤('''브리샤 전투''') 베로나로 진격했다. 베로나 방면군 사령관 뤼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아디게 강으로 둘러싸인 베로나에서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마을 북쪽에 소규모 부대를 보내 눈에 띄지 않게 강을 건넜다. 이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폼페이아누스가 대규모 파견대를 보냈지만 오랫동안 게르만족과 혈투를 치르면서 압도적인 전투력을 갖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소규모 부대에 격파당했다. 콘스탄티누스군은 베로나를 포위하여 식량을 수급할 여지를 박탈했다('''베로나 전투'''). 폼페이아누스는 극비리에 베로나를 빠져나온 뒤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서 베로나를 구출하려고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본대에 포위를 계속 이어가게 한 뒤, 자신은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폼페이아누스와 대적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폼페이아누스는 전사했고, 그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베로나는 곧 항복했고, 아퀼레이아, 무티나, 라벤나가 뒤를 이었다. 막센티우스는 압도적인 전투력을 과시하며 밀고 내려오는 적과 정면 대결하지 않기로 하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앞세워 수성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천천히 나아가면서 로마 주변의 도시들을 하나둘씩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자, 로마 시민들이 동요했다. 312년 10월 27일, 군중들이 전차 경주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무적이라고 외치며 막센티우스를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참고로 이것이 조롱인 이유는 막센티우스가 봉기한 후 원로원으로부터 '무적의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이에 맞게 본인도 군신 마르스를 섬겼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를 격퇴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센티우스는 이런 상황에서 수성전을 벌였다가는 내부의 배신자가 성문을 열고 항복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야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312년 10월 28일, 그는 로마에서 출진하여 밀비우스 다리와 티베르 강을 후방에 둔 채 적과 대면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의 가정교사로 일했던 [[락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밤에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병사들의 방패에 '키로 십자가'(XP)를 새기게 했다고 주장했다.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서 황제가 생전에 자신에게 >'''"병사들과 함께 빛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모양의 형상이 하늘에서 구현된 걸 목격했으며, 그 밑에는 '이로써 승리하리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했다. 다만 황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때 그리스도의 상징이 담긴 표식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역사적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는 상대보다 2배 많은 병력을 동원했지만 현격한 전투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우수한 기병대가 막센티우스의 기병대를 격파한 뒤 적 보병대의 측면을 공격해 그들을 티베르 강으로 밀어냈다. 병사들은 황급히 밀비우스 다리를 향해 도주했으나, 다리가 중간에 무너지는 바람에 수많은 이가 익사했다. 막센티우스는 말을 타고 있다가 병사들에게 밀려 티베르 강으로 떨어진 뒤 익사했다. 그의 시신은 나중에 강에서 건져진 뒤 수급이 베어져 로마 거리를 행진한 후 카르타고로 보내졌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시에 입성한 뒤 승리를 선포하고 원로원으로부터 서방의 황제로 인정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